밤의 언어.
어슐러 크로버 르귄 지음. 조호근 옮김. 서커스(2019)
<밤의 언어>는 르귄의 강연과 에세이를 모은 평론집이다. 내가 읽은 책은 1989년에 출판된 ‘1979년 판본’의 개정판이다.
르귄의 전미 도서상 수락 소감이 매우 감동적이라기에 찾아 읽게 되었다.
참고로 이 책에 실린 <전미 도서상 수락 연설>은 2014년 전미 도서상 공로상 수락 소감이 아니다.
알고보니 1972년 르귄은 ‘머나먼 바닷가’로 전미 도서상 아동문학상을 수상했었고, 그 때 이 책에 실린 연설을 했었다.
당연하겠지. 1979년에 출판된 책에 2014년도 글이 실릴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2014년 전미 도서상 수락 소감>이 실려 있지 않아도 르귄의 문학을 좋아하고, 판타지와 SF 소설을 써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르귄은 어떻게 SF 소설가가 되었나.
에세이 ‘몬다스의 시민’에서 우리는 던세이니와 톨킨 문학에 매료된 십 대와 이십 대 시절의 르귄을 만날 수 있다. 몬다스는 던세이니의 ‘꿈의 땅에서 온 이야기’에 나오는 가상의 국가 이름이다.
르귄은 이미 아홉 살에 첫 단편을 썼고 열두 살 때는 SF 단편을 투고했다. 오빠와 함께 십 대 초반 SF 잡지에 열렬히 빠져들었으나 십 대 후반부터는 기계와 군인 이야기만 다루는 듯한 SF에서 멀어졌다고 한다.
습작 시절 완성한 장편이 다섯 권에 이를 정도로 계속 글을 썼으나 출판사에 원고가 거절당한다.
삼십대 초반에 르귄은 친구 덕분에 SF를 다시 만나게 된다. 당시 출판사는 장르에 속해 있거나 명성이 있는 작가의 책만 출판했다고 한다. 책을 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르귄은 SF 장르에 문을 두드린다.
처음에는 얼개로 사용할 만큼도, 즉 단편에서 소재로 삼을 만큼도 과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는 르귄은 그저 우주복을 입은 요정 이야기를 써내려갔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P27
내가 가볍고 형식적인 단편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쓴 SF 단편은 훗날 ‘로캐넌의 세계’라는 중편소설의 기반이자 도입부가 되었다. 나는 새로 사용하는 도구의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이어진 작품에서 나는 계속해서 나 자신과 SF 장르라는 매질의 한계를 시험했다.
P30
1967년에서 68년에 걸쳐, 나는 <어스시의 마법사>와 <어둠의 왼손>을 통해 내 순수한 판타지의 흐름을 SF의 흐름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나는 계속해서 나 자신과 장르라는 매질의 한계를 밀어붙이려 시도했다.
그 결과 탄생한 소설 <빼앗긴 자들>은 르귄에게 네뷸러상과 휴고상 동시 수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P62
예술에서는 최고가 곧 기준이 된다
<엘프랜드에서 포킵시까지 중에서>
르귄은 제대로 된 비평을 받지 못해 자기 재생산, 타인의 복제를 반복하는 SF 문단의 현실을 비판했다. ‘신들의 사회’의 작가 로저 젤라즈니조차 그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르귄은 예외였다. 명성에 안주하지 않은 르귄의 치열하고 엄격한 탐구 정신. 진정한 예술가의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P109
나는 성숙이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성장해서 도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가 죽고 어른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살아남아 어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어린이의 내면에 성숙한 인간에게 필요한 최고의 잠재력이 전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잠재력 중 가장 인간적이고 인도적인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인은 왜 드래곤을 두려워하는가 중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사춘기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헤세의 문장은 성숙에 대한 르귄의 정의로 인해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르귄의 판타지 소설 어스시의 마법사는 게드가 내면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성장소설이다. 에세이 <아이와 그림자>에서 르귄이 말하는 그림자를 만나보자.
P123
현실 세계를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아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자기 내면에도 혐오스럽고 사악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심리학자 융은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P125
위대한 판타지 작품이란 바로 (그림자를 찾는) 그 여정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의식 세계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논리적인 일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정신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상징의 언어만이 그런 여정을 사소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다.
르귄은 아이가 자신의 그림자를 다루고 인도하는 방법을 배우려면 진실한 상상의 이야기, 판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독자라면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어떻게 소설이 탄생하는가 르귄의 말을 들어보자.
P33
(편집자가 어스시의 세계를 어떻게 설계했는지 질문하자)
하지만 저는 설계한 게 아닌데요. 발견한 거죠. 어디서요. 제 무의식 속에서요.
<꿈은 스스로를 설명해야한다 중에서>
P213
내가 처음 ‘독약과 그 이후’를 구상했을 때...... 그 순간 뚱뚱한 여자와 비쩍 마른 남자라는 강렬한 시각적 심상이 등장한 것이다.
사실 소설이란 그런 환영의 찰나다. ...
다른 모든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소설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는 응축된 환영이다.
<SF와 브라운 부인 중에서 / 작가 앵거스 윌슨의 글 인용 >
작가가 되려는 독자를 위한 진실한 조언 <글쓰기에 관하여>를 보니 작가가 되는 지름길은 없었다.
P352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두 사람은 일곱 여덟 살 때부터 글을 쓰고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 속 풍경을 익히고 그 풍경을 묘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상상력을 이용해 글을 썼으며 그 상상력이야말로 자신의 영혼이라는 밭이랑을 가는 농부의 도구입니다. 소설이란 그 깊은 심연에서 오는 것입니다. 소설가는 내면으로부터 글을 쓰지요.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 동안 외부에서 일어난 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
글쓰기의 경우에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쓰고 쓰고 또 써야 하는 겁니다. 쓰는 방법을 익힐 때까지요.
...
글쓰기는 공유할 수도 없으며 아주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면 기술로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작가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책을 글을 쓰는 등, 홀로 연습하면서 깨우쳐야 합니다.
르귄이 ‘밤의 언어’개정판(영국판)을 내게 된 이유는 도덕적, 지적 절박함 때문이었다고 한다.
개정의 주된 내용은 총칭대명사 he를 문맥, 소리, 기분에 따라 they, she, one, I, you, we로 수정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he가 결국 남성 대명사여서 여성이 배제되었던 정치적 맥락과 닿아 있다. 양성 인간이 살아가는 행성을 무대로 한 소설 ‘어둠의 왼손’은 등장인물을 he로 지칭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 ‘어둠의 왼손’을 논한 에세이 <젠더는 필요한가?>인데 르귄은 개정판에서 이 에세이의 원 텍스트는 그대로 싣고 주를 달고 자기비판을 덧붙였다.
이밖에도
검열을 다룬 <영혼의 스탈린>을 통해 에브게니 자먀친을 알게 되었다.
필릭 K.딕을 추모하는 <겸허한 사람>, 팁트리 쇼크의 주인공인 앨리스 셀던의 단편집 ‘어느 늙은 유인원의 별 노래’에 붙인 서문<어느 늙은 유인원의 별 노래 머리말>에서 르귄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었다.
드래곤의 목소리를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정치가들의 악몽을 실연해 보이며 인생을 살게 된다. 우리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세계의 절반은 항상 어둠에 잠겨 있다. 그리고 판타지는 시처럼 밤의 언어로 말한다.
이 책의 기획자이자 편집자였던 수잔 우드가 해설에서 언급한 르귄의 칼럼 < 판타지는 시처럼 밤의 언어로 말한다>의 일부분이다.


칼럼이 본문에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판타지와 SF의 대가 르귄의 에세이집 제목으로 딱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일러바치는 심장 -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4) | 2025.05.21 |
|---|---|
| 디스토피아 SF소설 우리들,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마틴(1884-1937) (1) | 2025.03.25 |
|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 (0) | 2025.03.16 |
| 술꾼, 최인호 단편소설 (1) | 2025.03.08 |
|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고 (6) | 2025.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