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

write5073 2025. 3. 16. 23:11

발터뫼르스 지음, 들녘, 2015
 
이 책은 책덕후들에게 헌정하는 판타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혹시 친척이나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거실 장식장을 가득 채운 책들에 빠져 그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적이 있다면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바로 그런 이들, 아니 그보다 더한 책처돌이들이 사는 차모니아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험 이야기이다.
 
차모니아에서 문학의 위상은 대단히 높다.
 
P18
만약 린트브름 족의 요새에 살고 있는 한 젊은 공룡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부모는 그에게 대부시인(代父詩人)을 한 명 정해준다.
 
대부시인이라는 기발한 발상이 가능한 작가 발터 뫼르스는 만화가이기도 하다. 책 사이사이 작가가 직접 그린 멋진 삽화를 볼 수 있다.
 
주인공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는 자신의 대부시인 단첼로트가 유산으로 남긴 어느 무명시인의 원고를 읽고 그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부흐하임의 문학이 상업화되어 타락했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시인에게 부흐하임(책마을)의 출판사를 찾아가라고 조언했던 것을 후회하던 단첼로트는 미텐메츠가 이를 바로잡기를 바랐다. 원고를 단서로 시인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미텐메츠는 필사본 분석 전문가라는 고서적상인 피스토메펠 스마이크를 소개받는데 사실 그는 악당으로, 시인의 실종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미텐메츠는 스마이크의 계략에 빠져 부흐하임의 지하묘지에 버려진다. 온갖 괴물과 책사냥꾼(지하도시 책의 약탈자)이 가득한 미로 속을 통과하면서 미텐메츠는 작가가 되는 여정을 시작한다.
 
p42
그 원고에서 나는 한 문장만을 인용하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원고의 마지막에 쓴 문장이다.
그것은 집필 장애 때문에 고통받는 시인에게 마침내 그의 작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착상이 떠오르는 구원과도 같은 문장이었다.
...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
 
다음에 어떤 문장이 와도 어울리는 이 신기한 문장을 시작으로 미텐메츠의 여행은 시작된다.
 
p74, p697
우리는 별에서 와서 별로 간다.
삶이란 그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일 뿐이다.
 
부흐하임의 고서적상인이 죽은 대부의 작품을 암송하자 미텐메츠는 깜짝 놀란다. 스마이크와 최후의 결전을 앞둔 미텐메츠에게 브흐링 단첼로트가 건네는 이별의 인사이기도 한 이 문장은 읽을 때마다 뭉클한 기분이 든다.
 
이 책에서는 오름이라는 특별한 단어가 등장한다.
p30
단첼로트 대부는 아직도 오름이라는 것에 대한 오래된 믿음을 굳게 지니고 있었다. 오름이란, 많은 시인들에게 최고의 영감의 순간에 그들 몸속으로 뚫고 들어간다는 일종이 신비로운 힘이다.
 
p719
오름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도덕이 아니라, 훌륭한 작가들 주위를 감도는 아우라처럼 신비스러운 힘이다.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러나 시인은 느낄 수 있다. 오름은 작가로 하여금 밤새 열병에 걸린 듯이 계속 써나가게 하는가 하면, 온종일 단 한 줄의 문장에 매달리게 하기도 하고, 작가의 주위에서 춤을 추면서 글 쓰는 작업에 매료시키는 보이지 않는 악령이다. 그것은 도취이며 활활 타오르는 것이다.
 
오름의 순간은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오래도록 오름의 상태를 유지하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예술이 탄생할 때 예술가들에게 오름의 순간이 온다.
 
p576
내 말은, 네가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네 안에 얼마나 환하게 오름이 타오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미텐메츠와 그림자 제왕과의 대화 중에서
 
그림자 제왕의 이 질문은 모든 창작자를 향하고 있다.
 
글이 안 써져서 재능이 없다고 고민하는 미텐메츠를 그림자 제왕은 그림자 성 지하의 괴물에게 데려간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온 미텐메츠에게 그림자 제왕은 말한다.
“이제 너는 경험을 했으니까 그것을 글로 써라.”
그리고 생사의 고비를 넘는 경험을 했음에도 글을 쓰지 못하는 미텐메츠에게 말한다.
 
p628
작가란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 있는 거지, 체험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만약 네가 무엇을 체험하려면 해적이나 책 사냥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네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냥 써야 한다. 만약 네가 그것을 너 자신으로부터 창조해 낼 수 없다면 다른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다.
 
그림자 제왕의 정체는 스마이크에게 인조인간 호문콜로스로 개조당한, 미텐메츠가 찾으러 헤매 다니던 그 시인이었다. 지하세계에서 책사냥꾼을 사냥하는 괴물로 전락한 시인은 미텐메츠에게 작가 수업을 하면서 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던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림자 제왕은 며칠에 걸쳐 지상으로 향하는 미로를 올라야 하는 미텐메츠에게 이렇게 말한다.
 
p653
그냥 계속 기어 올라가는 거다. 마치 소설을 쓸 때처럼.
 
빛을 보면 타버리는 종이 몸이 돼버린 시인은 스마이크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느니 지상의 빛을 쬐고 죽기를 택한다. 그림자 제왕의 죽음은 순수한 시인의 영혼으로는 출판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현실을 은유한 것이어서 더 비극적이다. 시인을 괴물로 만든 스마이크는 돈으로 서점가를 지배하고 문학 종사자들을 매수하여 출판시장을 손에 넣은 인물로 현재 출판시장을 풍자한다.
 
차모니아에 사는 종족은 다양하지만 꼭 소개해야 하는 종족이 있다. 오래된 책에서 태어나는 브흐링 족이다. 브흐링들은 자기가 선택한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한다. 하루 종일 책을 읽는데 너무 많이 읽으면 살이 찌기 때문에 독서 다이어트까지 한다. 심지어 자기소개를 자기가 선택한 작가의 작품을 암송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미텐메츠는 단첼로트의 엄격한 문학 수업 덕분에 수많은 작가와 작품, 문학사를 알고 있어서 오름이라고 불리는 이름 맞추기 게임에서 브흐링들의 인기를 얻었다.
 
칠백페이지가 넘는 분량 때문에 선뜻 손 대기 망설였던 책이지만, 습작하는 마인드를 다지면서 재밌게 읽었다. 꿈꾸는 책들이란 독자들에게 읽히기를 꿈꾸며 부흐하임에서 오랜 세월 방치된 ‘버려진 책들’이라고 한다. 힘들게 쓴 책을 출판하는 영광을 얻는다 해도 그렇게 출판된 책이 많은 독자를 만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도 마지막은 격려의 문장으로 마무리할까 한다. 너무나 위대한 작품에 압도되어 작가가 아니라 영원히 독자로 숨고 싶을 때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p30
언젠가는 충격이 영감으로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