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바치는 심장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번역 박미영, 출판 스피리투스 2019)
에드거 앨런 포(1809~1849)
근대 미국 문학의 뿌리.
근현대 환상문학과 추리문학의 창시자.
그의 영향을 받은 작가와 작품들은 무수히 많다.
셜록 홈즈, 괴도루팡, 에도가와 란포, 레이먼드 커버, 스티븐 킹. 이 모두는 에드거 앨런 포로부터 비롯되었다고.(출판사 책소개 발췌)
아주 어릴 때 책이 닳도록 읽은 ‘유령선’이 아무래도 포의 장편 소설 ‘아서 고든 핌의 대모험’이라는 의심이 든다.
외가댁에서 굴러다니던 문고판 소설 속에 실렸던 ‘검은 고양이’와 ‘윌리엄 윌슨’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포의 공포 단편이었다.
사춘기 시절 앞 구절이 좋아 외워서 중얼거렸던 ‘애너벨 리’는 포가 쓴 마지막 시였다고 한다.
오래고 오랜 바닷가 어느 왕국에
여러분이 아실지도 모르는 한 소녀 애너벨 리가 살고 있었네
나만을 사랑하고 생각하니 그 밖에 딴생각이 없었네
OTT가 없던 시절, 텔레비전에서 영화 ‘어셔가의 몰락’을 보고 무서워서 새벽에 식은땀을 흘리며 가위에 눌렸던 경험까지 나의 유년기와 사춘기 모두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자잘한 기억들이 숨 쉬고 있다.
사놓고 먼지만 쌓인 하늘연못 번역본(2002) ‘우울과 몽상(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은 너무 재미가 없어서 읽다 말다 했다.
‘일러바치는 심장’은 그나마 따끈따끈 최신 번역본이다. 원서가 집필된 지 이백 년 가까이 된 소설이다 보니 시대가 변하고 단어의 어감이 달라지고 최초였던 기발한 착상이 이미 후배 작가들에 의해 여러 번 오마주 되어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포의 소설은 현대 소설들과 비교해 볼 때 세련되지는 않았다. 문학적으로 최고봉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어두운 광기만큼은 이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날 것 그대로다.
어릴 땐 포의 소설이 괴기스럽고, 불쾌했고, 도대체 그런 상상을 왜 하는지 궁금했다.
이제는 좀 공감이 간다. 누군가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들끓었던 마음, 내 영혼의 어둠도 나의 일부이기에 어느새 소설 속 주인공의 살의(殺意)의 동조자가 되어 파멸의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단편 ‘검은 고양이’는 포의 대표작이다. 유순했던 주인공은 술로 인해 타락한다. 애완묘였던 플루토는 타락한 주인공의 희생물이 되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플루토를 연상시키는 애꾸눈의 검은 길고양이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리고 온다. 죄책감은 살의로 바뀌고 주인공의 악마성을 부추긴다. 희생자였던 고양이는 심판자가 되어 주인공을 파멸시키는데, 주인공과 고양이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파국으로 휘몰아치는 전개가 압권이다. 단편 중 제일 재밌었다.
‘어셔가의 몰락’은 고딕소설(중세 건축물이 주는 폐허스런 분위기에서 소설적 상상력을 이끌어 공포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유럽 낭만주의 소설)다운 음산한 분위기와 유령보다 더 무서운 등장인물을 내세워서 공포의 몰입감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유전병에 시달려 단명하는 어셔가문, 낡았지만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있는 음산한 저택. 포가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에서 공포는 활개를 칠 수밖에 없다. 얼마나 영리하게 상황을 잘 만드는 작가인가.
도둑맞은 편지
탐정 뒤팽이 도둑맞은 편지를 찾아내는 이야기다. 범죄자의 심리를 꿰뚫는 뒤팽의 심리 추리에 흥미를 느낀다면 극적 재미가 클 것이다. 파리 경찰국장이 D장관의 집을 철저하게 수색하는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되었는데 뒤팽이 그 철저한 수색의 허점을 찌르는 전개가 좋았다. 그런 디테일이 하나하나 쌓여야 뒤팽의 우월함과 천재성이 돋보이는 것이기에.
아몬틸라도 술통
벽돌 속에 사람을 매장하는 식의 ‘범죄 은닉’의 욕구는 포를 강하게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 이미지를 변형시킨 소설들을 여러 편 썼다는 것은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자기만의 비밀을 꼭꼭 숨기고 싶었던 포의 내면의 갈등이 엿보인다. 비밀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했던 포의 갈등은 소설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몬틸라도 술통’에서는 완전범죄로 끝났지만, ‘검은 고양이’에서는 고양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들통이 났다. ‘일러바치는 심장’에서는 죄의식에서 비롯된 환청 때문에 스스로 범죄를 자백한다. 내가 포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각 범죄가 모방이 가능할 만큼 철저하게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상상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촘촘하게 허구의 세계를 만들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 속의 세계가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어느 독자가 믿어주겠는가.
붉은 죽음의 가면
포의 주변 인물들이 실제로 결핵으로 죽어갔기 때문에 감염된 지 30분 안에 피를 토하며 죽는 적사병은 결핵에 대한 공포를 은유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막강한 권력자 프로스페로는 적사병을 피해 천여 명의 추종자를 데리고 수도원으로 피신한다. 오래도록 지속될 줄 알았던 그들의 향락은 가장무도회에 나타난 정체 모를 붉은 가면을 쓴 이를 만나며 끝장이 난다. 오만했던 인간들이 병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결말과 화려한 색깔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미로처럼 배치된 거대한 방들의 이미지는 공포와 신비가 어우러져 마치 한편의 뮤직 비디오를 연상시킨다.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치료법
포의 기괴한 상상력은 웃음도 공포로 만든다. 타르를 칠하고 페더(깃털)로 몸을 장식한 이들은 정신병자인가, 정상인인가.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역할 바뀜에 실소를 머금어야 하지만 어느새 실소는 공포로 바뀌고 독자는 전율한다.
지구의 반대편을 여행할 때 벌어지는 시차를 소재로 한 ‘일주일에 일요일 세 번’, 죽음의 감옥에서 과학적 사고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는 이단자의 구사일생을 그린 ‘구덩이와 추’, 화가가 난파하는 배에서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수상쩍은 화물의 이야기 ‘긴 상자’, 어릿광대의 복수를 다룬 ‘절름발이 개구리’ 등 총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공포, 환상, 추리 등 장르 문학의 원형을 일구었던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한글로도 어느 정도 가독성있게 읽을 수 있는 번역서였기에 아쉽지만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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