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노트

삼생삼세 십리도화 -불완전한 사랑꾼, 익군 이경에 대하여

write5073 2025. 4. 23. 09:01

중국 드라마 삼생삼세 십리도화는 58회에 이르는 긴 이야기답게 다양한 등장인물이 나온다. 그중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퇴폐남이면서도 한 사람만을 평생 사랑하는 비운의 캐릭터 '익군 이경'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퇴폐적이면서도 순수한 서서브남주역을 너무나 잘 표현한 장빈빈배우님의 열연이 인상 깊었다.
 
익족은 힘으로 따지면 천족과 대등한 세력이다. 30만 년 동안 천족의 영향력 아래 있어서 불만을 품고 사해팔황의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 익군 경천은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남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익족의 수장인데 전쟁에서 패하자 동황종(세상을 파멸할 힘을 가진 법기)을 열어서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자식이 죽으면 자신의 힘이 증가하는 마법까지 걸어놓은 무자비한 악당이다. 그런 경천과 어울리지 않게 둘째 아들 이경은 사랑꾼이라서 곤륜허(신선이 수련하는 곳)의 사음(구미호족 백천이 수련을 위해 남자로 변신해 사음이란 이름으로 묵연의 제자가 된다)에게 일편단심이다. 이경의 마음은 사음뿐인데 서서브남주라서 그런지 중요한 타이밍을 계속 놓친다. 옥혼을 주러 갔는데 이미 사음은 사라진 뒤였거나, 7만 년을 찾아다닌 사음이 하필 다른 여자 신선과 사랑을 나눌 때 눈앞에 나타나는 등.
 
사음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곤륜허를 찾아가 사음을 무한정 기다리는 이경. 이경은 사음이 천족인 줄 아는데 천족과 익족은 서로의 기운이 달라 화합하지 못하며(서로의 땅에 가면 법력을 쓰지 못함) 자손을 낳을 수도 없다는 설정이다. 원작에서는 동성인 줄 알고 결혼을 망설인다. 방송심의에 걸리니까 설정을 바꿨는데 그러다보니 인과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옥의 티가 있다. 어쨌든 이경은 익족 수장의 아들이니까 결혼을 허락받을 리가 없다. 그래서 무작정 들이대다 사음의 첫사랑이 되긴 했는데 결국 그 사랑을 지키지 못한다. 사음의 모습으로 변신한 현녀의 유혹에 넘어가 관계를 맺는 모습을 사음에게 들키고, 사음과 부부가 못될 것 같으니까 현녀를 사음 대신 택하고, 현녀에게 한 번 목숨을 빚지니까 평생 부부로서 현녀를 안고 간다. 현녀는 계략녀이자 집착녀이기때문에 결혼생활이 순탄할 리가 없다.
 
묵연(사음의 사부, 동황종을 봉인하다 혼이 흩어짐)이 죽었을 때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사음이 옥혼을 빌려달라고 사정했다. 둘의 관계가 회복될 유일한 기회였는데 묵연을 질투한 이경은 옥혼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경은 7만 년 후 묵연의 부활을 위해 신지초를 구하러 온 야화(묵연의 동생으로 천군의 손자로 환생하여 백천의 약혼자가 됨)에게 묵연이 살아나면 동황종의 봉인이 풀려서 세상이 위험해지니까 묵연과 사음에게만 좋은 일이라고 경고한다. 질투하는 그의 모습은 인간적이지만 정인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사부 묵연을 살리고 싶어하는 백천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야화는 신지초를 구하느라 한 팔을 잃은 데다 단약을 만드느라 자신의 평생내공을 다 소진한다. 이에 감동한 백천은 야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결국 야화는 백천의 마음을 얻었지만, 이경은 사음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익계의 사내들은 다 이렇게 주량이 센가요?
딴사람은 모르겠고 내 주량은 말이다. 7만 년 동안 조금씩 늘어난 거겠지.
 
7만 년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찾아다니다 주량만 늘어난 이경. 이경이 사음을 잊지 못한 것은 백천의 말대로 집착일 뿐이었을까. 사음에게 자신을 향한 마음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이경은 물속에 빠져 자살하려고 한다. 그가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익군이라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아버지를 막기 위해 자신의 피로 아버지 경천의 영혼을 소환하여 소멸시키려고 한다. 결국 경천에게 패한 이경은 죽고, 경천은 더 큰 힘을 얻어 봉인을 풀고 나온다. 익족의 패권을 노리는 익족의 장수들에게는 마음을 얻지 못하고, 법도만 따지는 별 볼 일 없는 천족에게는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사고만 치고 다니는 익후 현녀 (죽은 아이를 살릴 단약을 만들겠다고 묵연의 시신과 야화의 아들 아리를 훔치기까지 함) 뒷수습까지, 나는 익군 이경에게서 찌질해보일지언정 현실을 책임지는 묵묵한 가장의 모습을 보았다. 첫사랑의 실패로 방황했던 청년이 진짜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
 
익군 이경은 탈것으로 기린수를 데리고 다니는데 이경의 기린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다. 어른으로 자라지 못하는 기린수는 이경의 내면아이로 보인다. 이경의 사회적 자아는 익족의 수장으로 위엄과 권위를 지닌 인물이지만 내면에는 소년처럼 순수한 모습이 자리하고 있기에 7만 년에 걸친 한결같은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내면아이가 어릴 적 욕구불만으로 성장하지 못한 자아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경을 보면서 실은 일생 동안 각자의 내면에 원형으로 자리하고 있는 자아의 본모습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순수한 자아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고 인간미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주연 남녀 배우를 돋보이게 하고, 드라마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주기 위한 서서브남주 캐릭터일 뿐이지만, 단순한 서서브남주로만 남기엔 참 복잡하고 안타까운 캐릭터, 익군 이경.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방황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때문에 어쩌면 가장 개연성있는 인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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